MBC "이제는 말할수 있다" (2005. 4. 3 / 제89회)
<8인의 사형수와 푸른 눈의 투사들>
오는 9일이면 ‘인민혁명당(인혁당)’ 사건이 일어난 지 30년이 된 다. 그러나 이 사건이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‘고문 에 의한 사법살인’으로 규명되었음에도 인혁당 관계자들의 명예회 복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. <이제는 말할 수 있다>에서 는 인혁당 사건 30주년을 맞아 인혁당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외국 인들의 시각에서 인혁당 사건을 재조명하려 한다. * 한국 민주화의 벗들, 월요모임(Monday Night Group) 1972년 한국에 거주하고 있던 50여 명의 외국인들은 학생들의 잇 따른 구속, 언론 자유에 대한 억압, 인권 유린 등 한국의 사회 문제 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. 이에 ‘월요모임’이라고 칭해지는 외국인들 의 모임을 만들고 매주 월요일 저녁 한국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다. 소식지를 발간해 정보를 공유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던 월요 모임의 활동은, 인혁당 사건을 계기로 보다 더 적극적인 형태로 변 하게 된다. * 미국은 인혁당 사건이 일어날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! 당시 영종도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시노트 신부(James Sinnott) 는 CIA 요원으로 있던 닐 도허티(Neil Doherty)로부터 “학생 운 동, 노동 운동 등 정부에 반하는 세력들 모두에게 죄를 씌울 무언 가가 짜 맞춰질 것이다”라는 이야기를 듣는다. 그리고 74년 4월 3일.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반유신 시위가 일어나 게 된다. 이른바 ‘민청학련(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)’ 사건. 당국 의 수사 발표에 따르면 공산계 불순단체인 인혁당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, 폭력혁명을 통해 대한민국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노선을 따르는 노농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것이었다. 한 마디로 인혁당은 공산주의자라는 것. 시노트 신부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닐 도허티가 예고한 사건 임을 알고는 충격을 받게 되고, 사건의 조작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 주한다. 그리고 시노트 신부는 냉엄한 시절, 언론에 가장 많이 보 도된 선교사로 기록된다. * “인혁당 사건은 조작된 것이다” - 외국인들이 밝히는 조작 의 근거들 인혁당 관계자 가족들로부터 사건의 억울함에 대해 듣게 된 조지 오글(George Ogle) 목사는 본격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다. 오글 목사는 월요모임 회원들과 함께 64년 1차 인혁당 사건을 조사하고 10년 후, 1974년 다시 불거진 인혁당 재건 위 사건을 비교 분석한다. 그리고 인혁당 관계자 부인들과의 면 담, 남편들의 활동 등을 소상히 기록하여 사건을 파악한다. 이렇 게 만들어진 수 십장에 이르는 월요모임 보고서는 30년이 지난 지 금까지 월요모임 회원인 린다 존스(Linda Jones)의 서재에 보관 되고 있다. 그 문서에는「‘인민혁명당’이라는 명칭은 사건을 확대 하기 위해 중정이 고안한 것으로 북한이나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연계 되었다는 증거가 제시된 바 없다」고 기록되어 있다. * 월요모임 활동, 최초 공개! 월요모임 회원들은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알리려 하지만 당시 국내 언론은 침묵으로 일관한다. 이에 월요모임 관계자들은 외신과 미국 정부, 그리고 미국 국민이라는 새로운 창구를 통해 정 보를 전달하게 된다. * 소식지의 제작 · 배포 월요모임 회원인 루이즈 모리스(Louise Morris)는 소식지의 제작 에 대해 “어떤 사람은 계엄령, 어떤 사람은 도시산업선교, 어떤 사 람은 박형규 목사, 어떤 사람은 인혁당에 관해 썼다”고 말한다. 이 들은 국내 상황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모아 소식지로 만들어 낸 다. 이들의 소식지는 한국뿐 아니라, 돈 오버도퍼(Don oberdorfer), 어브 챕먼(Irv Chapman) 등 외신 기자들에게도 전해 져 한국의 사정을 생생히 알리는 역할을 했다. - 푸른 눈의 투사들, 투쟁에 나서다 월요 모임 회원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미국 정치인, 언론인 등 영 향력 있는 인사들과 접촉하여 고문으로 조작된 인혁당 사건과 독 재 정권에 대해 알렸다. 또한 1974년 11월로 계획되어 있는 포드 대통령의 방한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로 해석될 수 있음을 우 려하고, 방한을 반대하는 62명의 서명 명단을 백악관으로 보낸다.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의 싸움 또한 멈추지 않았다. 린다 존스를 비 롯한 월요모임 회원들은 시카고 등에서 반 박정희 정권 시위를 이 어나갔으며 시노트 신부 같은 이는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시위하 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. - 사법 살인과 추방된 투사들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혁당 관계자등 여덟 명은 4월 8일 대 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뒤 20시간도 채 되지 않아 성급하 게 처형되고 말았다. 월요모임 회원들은 미 대사관 앞에서 검은 두 건을 쓰고 목에 올가미를 멘, 교수형 장면을 재연한다. 그리고 “이 것이 조용한 외교의 결과입니까?” 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 고 미국의 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했다.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 간 것은 인혁당 사건을 최초로 공론화한 조지 오글 목사와 가장 활 발히 사건을 알렸던 시노트 신부에 대한 한국 정부의 추방 명령이 었다. * 미국과 한국은 한통속? 시노트 신부는 “미국 정부나 미국이 당시 상황을 알게 되면 변화 가 생길 것으로 기대하며 인혁당 사건을 알리고자 애썼다”고 증언 했다. 하지만 이것은 순진한 생각이었고, 상황은 어떤 것도 바뀌 지 않았다. 그리고 그 배경에는 냉전이라는 커다란 장치가 숨어 있 었다. 이어 시노트 신부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. “미국은 자국 내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선호하지만 해외 의 경우 미국의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로서 독재정권 을 선호한다.” 미국은 냉전체제를 유지하고 자국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독재정권에 대해 묵인하는 길을 택했다. 그리고 박정희 정 권은 미국의 침묵 속에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며 인혁당 사건을 권력 유지에 이용했던 것이다. * 冷戰,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. 남과 북의 팽팽한 이데올로기 대립은 냉전이라는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. 공산당에 대한 공포는 ‘빨갱이 처단’에 대한 국민 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 냈고, 박정희 정권은 이를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던 민주화를 갈망하는 민중들을 잠재우기 위해 이용한다. 냉전이라는 이름의 끝없는, 그러나 소리 없는 전쟁은 희생자를 필 요로 했다. 그리고 여덟 명의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30년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. 우리 가운데 냉전은 여전히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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